사노비 출신 부산 동구 출신(추정)
작은키 검은 얼굴 능숙한 일본어 - 안용복
300년전 어느날, 안용복은 어부 십여명과 함께 울릉도 근처 조업을 하던 중
불업 어업 중인 일본 어부와 충돌💥하게 되었다.
▶ 안용복의 1차 도일 (1693년 봄)
대립이 격해지자 일본 일본어부들은 그를 오키섬까지 납치하였다.
"이러하고 이러하니까 독도는 우리땅인데
왜 독도 울릉도 지역에서 너희들이 조업을 하느냐!
그리고 왜 죄없는 나를 납치해?"
안용복은 침착한을 잃지 않고 일본인 어부 40명 앞에서 논리적으로 따졌다.
당시 당황한 일본관원(호키슈태수)은 일본막부(애도막부)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일본 막부는 고심끝에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
라는 서계를 써주어 나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일본에 납치된 지 9개월 만에 돌아왔지만,
허락 없이 국경을 넘었다는 죄목..
( 숙종실록26권,20년(1694) 2월23일 )
안용복은 억울하게 곤장을 100대나 맞았다.
이후 조선에 안용복의 담판 사실이 알려졌고
이 사건은 울릉도와 독도 문제에 대해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숙종은 말했다.
1. 울릉도와 독도를 엄밀히 조사하라
2. 관원을 파견하라
3. 독도에서 왜인의 조업을 금지하게 하라
그렇게 이 사건은 독도가 우리 땅임을 국내에서도 일본에서도 다시 확인되는 결과를 낳았다.
안용복의 2차 도일 (1696년)
결국 안용복은 다시 한번 일본에 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 관리로 자칭해 일본으로 가는 대담한 계획을 실행했다.)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진 「조선팔도지도」와
안용복은 입을 관리복 등을 준비하여
뜻을 함께하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울릉도로 출발했다.
울릉도에선 여전히 어부들의 남획이 계속되고 있었고
분노한 안용복 일행은 일본 어부들을 쫒아냈다.
그들은 조울양도 감세장신 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
즉, 울릉도와 독도를 감시하는 관리라는 깃발을 내걸고
독도를 거쳐 일본 돗토리현 호키(伯耆) 주로 갔다.
당신들이 말하는 마쓰시마는 우산도(독도)이고,
타케시마는 울도요. 두 섬은 조선의 영토요.
호키주(현, 일본 시네마현)에서 나 안용복은,
일본 관리들 앞에서 조선팔도지도를 꺼내들고
두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놀란 막부는 일본어민들의 울릉도와 독도의 출입을
다시 한 번 금지하게 되었다.
<다케시마(울릉도) 도해금지령 (복제본) 출처: 외교부 독도>
안용복과 동료들이 조선으로 돌아간 이후,
1696년 10월, 쓰시마 도주가 일본 어민의 울릉도 출입을 금지 하였고,
1698년 4월, 조선 정부는 막부로부터 조선의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일본인의 출어(出漁)를 금지하는 것으로 일단락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정부 차원에서
울릉도와 독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다시 일깨워 주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이후로 약 200년 동안(고종때까지) 은 울릉도와 독도를 함부로 넘보지 못했다.
조선의 양반도 아닌, 정치가도 아닌
평범한 어부 한명인 내가 목숨을 걸고 이뤄냈다.
"안용복은 귀국 후 사사로이 국제 문제를 일으켰고,
관리를 사칭하였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다행히 일부 신하들이 안용복의 공로를 인정해줘,
간신히 사형을 면하지만 외딴섬으로 유배 갔다."
이후 몇년 뒤 조선과의 외교문서를 통해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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